(1823년 3월 12일 - 1899년 1월 19일)
"조선에 망국병이 들고 빈약국이라고 경멸한다 해도
언젠가 소생할 때가 올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스승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당시-
소다 가이치 / 曾田 嘉伊智
(1867년 10월 20일 - 1962년 3월 28일)
우에노 다키코 / 上野 タキ
(1878 - 1950)
부부
YMCA에서 일하면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고
독립투사들의 석방에 온 힘을 쏟았다.
인계받은 보육원에서 1,000명의 한국인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 후, 1961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가 돌보았던 한국인 아이들과 마지막 여생을 지내고
양화진 묘원에 안장됨.
우치무라 간조 /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야마자키 게샤이 / 山崎今朝彌
(1877년 9월15일 - 1954년 7월 29일)
"만약 미래에 일본이 미국에 병탄되어
미국인이 일본인을 학살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나는 그 때 반드시 일본의 독립을 위해 광분할 것이다.
나는 지금 조선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 진실로
"내 자신을 꼬집어 남의 아픔을 알라"는 말을
일본인으로서 절실히 느낀다."
-1920년-
요시다 고조 / 吉田耕三
(? ~)
서울 성수동에 있는 서울일본인교회 담임목사
한국 입장을 대변하여 자신의 모국인 일본정부에
과거사 사죄를 촉구하고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왔다.
요시다 목사는 일본정부, 외무성, 신문사, 방송국 등에
한국의 입장에서 과거 만행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보상해 줄 것을 촉구해 오고 있다.
아리미쓰 교이치 / 有光 敎一
(1911 - 2011년 5월 11일)
한국 고고학의 개척자.
한국 고고학의 시작점에서부터 묵묵히 한국인 학자들을 지원해 준 공로자.
오다 나라지 / 織田 楢次 (전영복 / 田永福)
(1908 - 1980)
일제강점기 조선의 복음 전도에 온 힘을 다한 인물이다.
일제의 식민지배 참상을 접하고 조선 선교를 결심한 오다는
함경도 산간벽지를 다니며 조선어로 전도했다.
평양과 수원 등지에선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자신을 가둔 수원경찰서장에게
“조선인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 일본인 제일의 죄”라고 외치기도 한 그는
패전 이후에도 재일조선인교회를 섬기며 조선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기노시타 나오에 / 木下尚江
(1869년 10월 12일 - 1937년 11월 5일)
"우리는 조선을 구제하기 위해 나섰다고는 하지만,
과연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경애하는 조선-
다카하시 노보루 / 高橋 昇
(? - ?)
평생을 조선 농법의 발전과 연구에 바친 농학자.
1919년 한국에 와서 해방될 때까지 남북한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한국인의 농법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자료를 조사했고 그가 죽은 뒤 1300쪽에 달하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출판.
한국 농촌진흥청은 다카하시와 꾸준히 접촉하면서 관련 농업 자료들을 요청했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아들이 선친이 남긴 모든 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했다.
후치자와 노에 / 淵澤能惠
(1850 - 1936)
한국 여성교육을 통해 한일 가교가 되다
후세 다쓰지 / 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한국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
-1910-
"앞으로는 조선, 대만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건만을 변호하겠다.
-1920-
재판에 기소된 독립운동가들을 수차례 변호했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해방 이후에는 주로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을 위한 헌법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 우리나라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해주었으며,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가담한 조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1924년 의열단원 김지섭의 변호를 1926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건에서 변론을 맡았다. 1946년 독립한국의 헌법 제정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담아서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했다.
하타다 다카시 / 旗田 巍
1908년 11월 7일 ~ 1994년 6월 30일)
역사학자
아사카와 다쿠미 / 浅川 巧
(1891년 1월 15일 - 1931년 4월 2일)
아사카와 노리타카 / 浅川 伯教
(1884년 8월 4일 - 1964년 1월 14일)
형제
일본의 한국 도예 연구가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향후 언젠가 자신으로 가득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1929년 (다쿠미)-조선의 산림녹화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개발한 수많은 임업기술 덕분에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이 푸름을 되찾았다.
조선의 민속예술품, 도자기, 소반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하여 우리나라 문화재 연구 자료를 많이 남겼다.
그의 친형과 같이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고 자신들이 모은 수천 개의 민예품을 기증했다.
'조선민족미술관'은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이 되었다.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면서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의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영화 백자의 사람-
이시바시 단잔 / 石橋湛山
(1884년 9월 25일 - 1973년 4월 25일)
"조선과 대만에 자유를 줘라.
그러면 세계의 약소국들은
일제히 일본을 신뢰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가장 낮은 지위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승격되고,
미영 등 다른 나라들은
그 반대 입장이 되지 않겠는가?"
노리마츠 마사야스 / 乗松 雅休
(1863 - 1921)
조선 사람처럼 입고 먹고 자며 조선말로 전도한 일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사죄의 마음으로 조선에 온 노리마쓰는
1900년 경기도 수원에 정착해 경성과 수원에서 복음을 전한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에도 조선인 전도에 헌신한 노리마쓰는 빈곤한 생활과 무리한 일정으로 병을 얻어 1921년 숨을 거뒀다.
그의 조선인 제자 김태희는 장례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노리마쓰 형제는 조선의 사람이 됐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이랍니까.”
가나야마 마사히데 / 金山 政英
(1909 - 1997년 11월)
제2대 주한(駐韓) 일본대사
〈과거의 불행한 역사 위에 새로운 일한 양국의 신뢰관계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이고, 또한 그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 서로를 아는 것이었다. 올바른 지식 위에서만이 상호 신뢰관계도 성립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느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좋다고 하고 다른 한쪽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서로가 좋아지는 도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나야마 대사는 책에서 ‘한국민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남북이 통일을 해서 하나가 되는 것도 간절히 소망했다. 그의 소망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그의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정문로의 하늘묘원에 있다.
사와 마사히코 / 沢 正彦
(? - ?)
일제의 만행에 사죄하며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
야나기 무네요시 / 柳 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사랑했던 일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시노 사쿠조 / 吉野 作造
(1878년 1월 29일 - 1933년 3월 18일)
"독립운동가에 대해 괘씸하고 포악하다는 식으로 도덕상의 오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920-
후지키 쇼겐 / 藤木 相元
(1923 - 2014년 5월 31일)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
740명의 조선인 징병군을 지휘하던 일본군 학도병이었다.
대부분 10대였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할 거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며 다독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그는 숨진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당신들의 유골을 반드시 조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영혼에 약속했다.
조선인 동료들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나섰지만,
스님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곧장 머리를 깎았다.
그는 유언으로
"일본에서 돌아오는 한국인 전우들의 영혼과 함께 잠들고 싶다"며
제주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제주도 출신이 많았기에, 현재 제주 애월읍 선운정사에 안치돼 있다그는 2013년 조선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친구로서 전우로서가 아닌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한다"
는 글을 남겼다.
니시다 쇼이치 / 西田 昌一
(1912 - 1985)
조선인을 위해 목숨을 건 일본인
고토구 슈스이 / 幸德秋水
(1871년 11월 5일 - 1911년 1월 24일)
"조선인민의 자유독립을 인정하라."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그가 쓴 시.
이소가야 스에지 / 磯谷 季次
(1907 - 1998)
조선 청년들과 함께 노동조합 건설 추진
함흥 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 수감
"일본은 한민족에 대한 속죄를 죽은 자에 대해서도 행해야 합니다"
-1991년, 서대문형무소 다녀간뒤 남긴말-
미야케 시카노스케 / 三宅鹿之助
(1899 - 1982)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신분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
오구라 신페이 / 小倉 進平
(1882년 6월 4일 - 1944년 2월 8일)
언어학자. 1911년 조선으로 건너와 고등학교 교사, 경성제대 교수, 총독부 학무국에서 일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 신라시대의 노래인 향가와 신라 고려시대 때 주로 썼던 표기법인 이두에 대한 연구성과를 남겼다.
이는 당시 한국인 학자들에게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조선어 방언에도 많은 자료를 남겼으며 이희승 방종현 등 국어학자들이 그의 제자였다.
한계와 비판도 있지만, 국어학의 초기연구성과를 남긴 그의 이름은 국어학 입문서, 개론서에 오늘날 까지도 자주 언급된다.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 枡富 安左衛門
(? - ?)
군산과 김제, 고창에 농장과 교회, 학교를 세워 노동과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가 세운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경우 지역주민에게 운영권을 무상 양도하고
자신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도 했다.
요코야마 야스타케 / 横山安武
(1843년 1월 30일 - 1870년 8월 22일)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일본이 융성하고 강한 국력을 갖고 있다면 뭐 때문에
조선을 상대로 무례한 일을 벌여야 하는가?
우리는 조선 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누인에게 원망을 사고 있지 않는가?
전쟁을 하려면 국제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
조선이란 약소국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안타까울 뿐이다."
-1870년, 그가 메이지 정부에 제출한 '조선정벌 반대 건의서'中-
건의서를 낸 후 할복자살함.
아사카와 다쿠미 / 浅川 巧
(1891년 1월 15일 - 1931년 4월 2일)
아사카와 노리타카 / 浅川 伯教
(1884년 8월 4일 - 1964년 1월 14일)
형제
일본의 한국 도예 연구가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향후 언젠가 자신으로 가득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1929년 (다쿠미)-조선의 산림녹화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개발한 수많은 임업기술 덕분에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이 푸름을 되찾았다.
조선의 민속예술품, 도자기, 소반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하여 우리나라 문화재 연구 자료를 많이 남겼다.
그의 친형과 같이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고 자신들이 모은 수천 개의 민예품을 기증했다.
'조선민족미술관'은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이 되었다.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면서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의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영화 백자의 사람-
이시바시 단잔 / 石橋湛山
(1884년 9월 25일 - 1973년 4월 25일)
"조선과 대만에 자유를 줘라.
그러면 세계의 약소국들은
일제히 일본을 신뢰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가장 낮은 지위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승격되고,
미영 등 다른 나라들은
그 반대 입장이 되지 않겠는가?"
노리마츠 마사야스 / 乗松 雅休
(1863 - 1921)
조선 사람처럼 입고 먹고 자며 조선말로 전도한 일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사죄의 마음으로 조선에 온 노리마쓰는
1900년 경기도 수원에 정착해 경성과 수원에서 복음을 전한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에도 조선인 전도에 헌신한 노리마쓰는 빈곤한 생활과 무리한 일정으로 병을 얻어 1921년 숨을 거뒀다.
그의 조선인 제자 김태희는 장례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노리마쓰 형제는 조선의 사람이 됐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이랍니까.”
가나야마 마사히데 / 金山 政英
(1909 - 1997년 11월)
제2대 주한(駐韓) 일본대사
〈과거의 불행한 역사 위에 새로운 일한 양국의 신뢰관계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이고, 또한 그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 서로를 아는 것이었다. 올바른 지식 위에서만이 상호 신뢰관계도 성립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느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좋다고 하고 다른 한쪽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서로가 좋아지는 도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나야마 대사는 책에서 ‘한국민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 잘 지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남북이 통일을 해서 하나가 되는 것도 간절히 소망했다. 그의 소망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그의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정문로의 하늘묘원에 있다.
사와 마사히코 / 沢 正彦
(? - ?)
일제의 만행에 사죄하며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
야나기 무네요시 / 柳 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사랑했던 일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시노 사쿠조 / 吉野 作造
(1878년 1월 29일 - 1933년 3월 18일)
"독립운동가에 대해 괘씸하고 포악하다는 식으로 도덕상의 오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920-
후지키 쇼겐 / 藤木 相元
(1923 - 2014년 5월 31일)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
740명의 조선인 징병군을 지휘하던 일본군 학도병이었다.
대부분 10대였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할 거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며 다독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그는 숨진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당신들의 유골을 반드시 조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영혼에 약속했다.
조선인 동료들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나섰지만,
스님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곧장 머리를 깎았다.
그는 유언으로
"일본에서 돌아오는 한국인 전우들의 영혼과 함께 잠들고 싶다"며
제주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제주도 출신이 많았기에, 현재 제주 애월읍 선운정사에 안치돼 있다그는 2013년 조선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친구로서 전우로서가 아닌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한다"
는 글을 남겼다.
니시다 쇼이치 / 西田 昌一
(1912 - 1985)
조선인을 위해 목숨을 건 일본인
고토구 슈스이 / 幸德秋水
(1871년 11월 5일 - 1911년 1월 24일)
"조선인민의 자유독립을 인정하라."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그가 쓴 시.
이소가야 스에지 / 磯谷 季次
(1907 - 1998)
조선 청년들과 함께 노동조합 건설 추진
함흥 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 수감
"일본은 한민족에 대한 속죄를 죽은 자에 대해서도 행해야 합니다"
-1991년, 서대문형무소 다녀간뒤 남긴말-
미야케 시카노스케 / 三宅鹿之助
(1899 - 1982)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신분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
오구라 신페이 / 小倉 進平
(1882년 6월 4일 - 1944년 2월 8일)
언어학자. 1911년 조선으로 건너와 고등학교 교사, 경성제대 교수, 총독부 학무국에서 일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 신라시대의 노래인 향가와 신라 고려시대 때 주로 썼던 표기법인 이두에 대한 연구성과를 남겼다.
이는 당시 한국인 학자들에게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조선어 방언에도 많은 자료를 남겼으며 이희승 방종현 등 국어학자들이 그의 제자였다.
한계와 비판도 있지만, 국어학의 초기연구성과를 남긴 그의 이름은 국어학 입문서, 개론서에 오늘날 까지도 자주 언급된다.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 枡富 安左衛門
(? - ?)
군산과 김제, 고창에 농장과 교회, 학교를 세워 노동과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가 세운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경우 지역주민에게 운영권을 무상 양도하고
자신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도 했다.
요코야마 야스타케 / 横山安武
(1843년 1월 30일 - 1870년 8월 22일)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일본이 융성하고 강한 국력을 갖고 있다면 뭐 때문에
조선을 상대로 무례한 일을 벌여야 하는가?
우리는 조선 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누인에게 원망을 사고 있지 않는가?
전쟁을 하려면 국제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
조선이란 약소국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안타까울 뿐이다."
-1870년, 그가 메이지 정부에 제출한 '조선정벌 반대 건의서'中-
건의서를 낸 후 할복자살함.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1992년 처음으로 일본군과 위안부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문서를 찾아냈고
하야시 에이다이 / 林えいだい
1933년 12월 4일 ~ 2017년 9월 1일
1933년 12월 4일 ~ 2017년 9월 1일
일본의 기록작가. 일본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취재해 기록으로 남긴 위인이다.
호사카 유지 / 保坂 祐二
(1956년 2월 26일 ~)
독도 연구자
하토야마 유키오 / 鳩山 由紀夫
(1947년 2월 11일 ~)
전 일본 총리
무릎 꿇기
다우치 치즈코 / 田内 千鶴子 (윤학자 / 尹鶴子)
(1912년 10월 31일 - 1968년 10월 31일)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따라 조선에 입국한후
한국전쟁 끝날때 까지 고아들을 끝까지 지켰음.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고아들을 돌보고 박정희에게 훈상을 받음.
훗날 장례식에 3만명이 몰림.
박 열 / 朴 烈
(1902년 3월 12일 (1902년 음력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
가네코 쿠미코 / 金子 文子
(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
부부
이 사람도 일왕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서 사형됨.
(정확히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하는데. 조사해보니 옥중 의문사)
이후 시체를 거두어갈 사람이 없어서
연인이었던 박열이 혼인신고한뒤 거두어감.
이시자와 타쿠보쿠 / 石川啄木
(1886년 2월 20일 - 1912년 4월 13일)
일본의 윤동주 시인 급의 천재 시인
안중근을 존경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그가 안중근 의사에게 보냈던 시
코코아 한잔.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이마무라 운레이
호사카 유지 / 保坂 祐二
(1956년 2월 26일 ~)
독도 연구자
하토야마 유키오 / 鳩山 由紀夫
(1947년 2월 11일 ~)
전 일본 총리
무릎 꿇기
다우치 치즈코 / 田内 千鶴子 (윤학자 / 尹鶴子)
(1912년 10월 31일 - 1968년 10월 31일)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따라 조선에 입국한후
한국전쟁 끝날때 까지 고아들을 끝까지 지켰음.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고아들을 돌보고 박정희에게 훈상을 받음.
훗날 장례식에 3만명이 몰림.
박 열 / 朴 烈
(1902년 3월 12일 (1902년 음력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
가네코 쿠미코 / 金子 文子
(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
부부
이 사람도 일왕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서 사형됨.
(정확히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하는데. 조사해보니 옥중 의문사)
이후 시체를 거두어갈 사람이 없어서
연인이었던 박열이 혼인신고한뒤 거두어감.
이시자와 타쿠보쿠 / 石川啄木
(1886년 2월 20일 - 1912년 4월 13일)
일본의 윤동주 시인 급의 천재 시인
안중근을 존경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그가 안중근 의사에게 보냈던 시
코코아 한잔.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이마무라 운레이
친한파 일본인 화가
가나가와현 쓰루미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 (大川常吉·1877~1940)
우물에 독? 내가 마셔보겠다. 조선인 300명 구한 일본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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